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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을까

Miqo 편집팀 · 출처 3개

처형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었어요

죄수는 지하실에서 증인도 없이 몇 분 만에 조용히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수세기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광장이나 도시 성문 곁에 단을 세우고, 장날이나 축제일에 맞춰 날짜를 정하고, 판결문을 큰 소리로 읽었어요. 돈도 많이 들고 번거롭고 위험했지만, 바로 그것이 목적이었어요.

옛 권력의 논리에서 범죄는 다른 사람에게 끼친 해만을 뜻하지 않았어요.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대응 역시 공개적이어야 했어요.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를 연극에 비유했어요. 사형수의 몸은 왕권이 어떤 개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주는 무대가 되었어요. 판결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낭독되었고, 법은 추상적인 규칙이기를 멈췄어요. 법은 바로 당신을 찾아오는 힘이었어요.

그래서 겉보기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세부가 생겼어요.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처형장까지의 긴 행렬. 사람들이 보는 앞에 그대로 매달아 둔 시신. 성문과 다리에 내걸린 머리. 군중이 흩어진 뒤에도 그 표시는 계속 작동해야 했어요. 사람들은 기꺼이 몰려들었어요. 처형일은 거의 축제와 같았고, 가족 단위로 찾아왔으며, 상인들은 음식과 사형수의 '마지막 말'을 담은 전단을 팔았어요.

무너지기 시작한 구경거리

이 각본은 모든 참여자의 협조를 바탕으로 했어요. 설교자는 교훈을 설명하고, 사형수는 회개하며, 집행자는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어요. 사형수의 역할은 미리 정해져 있었어요. 회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 각본은 계속해서 어긋났어요. 집행자가 실수하면 군중은 이번에는 그를 야유했어요. 사형수가 침착하게 버티거나 단 위에서 농담을 하면, 본보기가 아니라 그날의 영웅이 되어버렸어요.

군중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자기만의 삶을 살았어요. 영국 법의 완화를 추진하던 개혁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즐겨 인용했어요. 소매치기를 처형하는 군중 속에서 소매치기들이 활동했다는 이야기였죠. 이것이 얼마나 널리 일어났는지는 이제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주장은 19세기 초 의회에서 언급되었어요. 그리고 50년에 걸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목록은 거의 사라질 정도로 줄어들었어요.

1861년까지 영국의 '피의 법전'은 200개가 넘는 범죄에서 4개만 남았어요

처형이 공개되지 않게 된 것은 자비 때문이 아니었어요. 광장은 더 이상 유용한 무대가 아니었어요. 모여든 군중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신문이 군중 없이도 세부 내용을 퍼뜨렸기 때문이에요.

처형은 담장 뒤로 숨겨졌어요. 바깥에는 공식 발표문과 감옥 위에 내건 검은 깃발만 남았어요. 판결이 집행되었다는 표시였죠. 구경거리는 한 줄짜리 소식으로 축소되었지만, 전달해야 할 내용은 정확히 같았어요.

1868영국, 처형을 감옥 담장 안으로 옮김
1936미국의 마지막 공개 처형
1939프랑스의 마지막 공개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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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은 왜 처형을 군중을 위한 구경거리로 만들었을까요?

출처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1975)
  2. 처형을 감옥 안으로 옮긴 1868년 영국 법
  3. 1861년까지의 '피의 법전' 축소. 마지막 공개 처형은 일반적으로 영국 1868년, 미국 1936년, 프랑스 1939년으로 알려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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